본문 바로가기
승H정전/직장생활

다른 사람의 의지를 짓밟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지

by 승공돌이 2024. 10. 6.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운이 좋게 큰 기다림 없이 삼성전자라는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이번 하반기에는 입사자가 많아서  SVP (Samsung Value Program; 흔히들 푸른 피 주입이라 부름)를 받지 못한 채로 부서에 배치가 되었다.

아무래도 푸른 피 주입을 받지 못해서 그런지 속된 말로 삼뽕(?)이라고 불리는 과도한 자부심은 없는 상태이기도 하고, 입사 교육 과정에서도 회사가 쉽지 않은 환경에 있으니 박사님들이 힘써줘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그런지 하루빨리 가치를 창출해서 함께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대학원 과정에서 교수님께서 자주 말씀하신 "상황이 어떻든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니?"라는 명언이 내 마음속에 남아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싶다.

 

챗 지피티가 묘사한 나의 모습 ㅋㅋ

 

아무튼 이런 상황에서 익명의 커뮤니티 사이트의 회사 사람으로 추정되는 사용자들이 서로를 비난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충격을 줬던 내용들을 몇 가지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 반도체연구소는 박사 출신들의 놀이터이다 (매출 증진에 아무 도움이 안된다는 뜻)
  • 파운드리사업부는 산업 폐기물을 만드는 곳이다 (수율 안정화가 되지 않은 환경에서 불량품이 생기면 그걸 산업 폐기물이라고 비하하는 것)
  • 초과근무하는 사람들은 자발적 노예와 마찬가지이다. 
  • 월급 500 따리들은 미래도 없는데 뭐하러 열심히 사냐 (회사의 상황이 좋지 않으면 인센티브가 적게 나오는데, 인센티브가 적은 해의 기본급인 500을 기준으로 어차피 열심히 하든 대충 하든 500 나오는 회사에서 뭐 하러 열심히 하냐는 뜻)

아직은 직장인 化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런 문구들에 대해서 공감보다는 반감이 많이 들었다. 아마 회사의 사정을 아직 파악하지 못해서 그들의 불만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시나 먼 훗날 1년차 직원인 나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았을까 회고해 볼 수 있도록 내 생각을 적어보고자 한다.

 

  • 반도체연구소는 박사 출신들의 놀이터이다, 파운드리사업부는 산업 폐기물을 만드는 곳이다.

타 부서에서 하는 업무 내용이나 프로세스를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들이 이런 식의 멸칭, 비난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선행기술을 아무리 열심히 개발한다고 해도, 그것이 매출 증대로 이어질 양산 기술로 발전될 가능성은 원래 그렇게 높지 않다. 연구개발의 영역이 원래 그런 성격이 강한 것이다. 오타니보고 4할도 못 치는 폐급 타자라고 비난하지 않듯이, 연구 개발에서의 성과가 10할 대로 양산으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그것을 비난해선 안된다.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선행기술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양산화까지 발전시키는 것은 또 다른 어려운 과업이다. 어쩌면 기술 자체가 잘못됐을 수도 있고, trial and error을 통해 안정화시킬 정도로 충분한 인력과 자원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심지어 수 천명의 근로자가 소속된 사업부를 통째로 비난하는 것은 (1) 무의미하고, (2) 상처만 주는 행위이다.

설사 이해한다고 했더라도 저런 식의 멸칭으로 남의 지위를 짓밟으면서 내뱉는 문장들은 상황을 개선하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초과근무하는 사람들은 자발적 노예와 마찬가지이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선,  솔직히 직장인 중에 자발적으로 초과근무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주어진 업무가 너무 많아서 그럴 수도 있고, 자신의 역량이 부족해서 그럴수도 있다. 만약 이 문구가 사실이라면, 자발적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주어진 업무에 대해서 미완의 상태로 방치하면서 근무하라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차라리, 가지고 있는 역량과 계약 근무시간에 맞게 업무량을 조정하라는 건설적인 비판이 있었다면 이해할 수 있었겠지만, 업무 하는 사람들을 노예라고 격하시키는 행위는 부적절하다고 본다.

  • 월급 500 따리들은 미래도 없는데 뭐 하러 열심히 사냐

사실 이 문구의 자세한 내용을 기억나는 대로 쓰자면, 본인은 물려받을 재산 (부동산으로 기억)이 있어서 500 받으면서 살아도 상관없는데, 너네는 뭐 하러 그렇게 사냐는 그런 뉘앙스였다. 불필요한 말을 각설하면 자기보다 상황이 좋지 않은 사람들을 짓밟으면서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려고 노력하는 행위는 본인에게도 타인에게도 상처만 남길 것이라는 생각이다. 비교는 할 수 있어도 남에게 상처를 줄 필요는 없다고 본다. 

 

어쩌면 나도 수년간 회사를 다니다 보면  지금 비판하고 있는 문구와 비슷한 말들을 쏟아내는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미래의 내가 그렇게 되어있다면, 우연히라도 이 글을 보면서 1년 차 회사원의 마음을 다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