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생활 70%를 향해 달려가던 무렵 익은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책 읽어주는 남자’는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나에게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단순히 “남은 군생활을 유익하게 보내야지!”라는 생각을 넘어 구체적으로 지금까지의 군생활에 대한 반성과 함께 내가, 그리고 의무경찰이 지향해야 할 군생활의 가치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에 읽은 후에도 강렬한 여운이 내 가슴속에 남았다.
본 작품은 주인공 소년 미하엘 베르크의 성장에 대한 내용과 함께 나치 전범 세대에 대한 시대사를 반영하여 역어내었다. 15세 소년 미하엘 베르크는 35세의 한나 슈미츠와 사랑에 빠져 매일같이 그녀와 함께 목욕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책을 읽어준다. 그러던 중 한나가 아무런 암시도 없이 홀연히 사라진다. 몇 년 뒤 미하엘은 나치 정권의 전범으로 재판을 받는 한나를 법정에서 만난다. 그녀는 문맹이었지만 그 사실을 숨기기위해 허위 보고서를 썼다는 누명을 짊어진다. 미하엘은 그녀의 행동에 의구심이 들지만 그녀의 판단을 존중하여 문맹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그녀가 종신형을 받는 것을 지켜보기만 한다. 그는 수감생활중인 한나에게 책을 읽은 녹음 카세트를 보내준다. 그녀가 문맹을 극복하고 편지를 쓰지만 미하엘은 그저 사담없는 독서 녹음만을 보냈고 한나는 석방 예정일에 자살한다.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명확한 이유는 나와있지 않다.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지 않는 미하엘의 태도에 느낀 절망이 가장 주요하게 작용하엿던 것이다. 한나는 문맹을 극복하고 미하엘을 기다렸으나, “책 읽어주는 남자”로 영원히 남고 싶어하는 미하엘의 태도에 외로움을 느낀 것이다. 한편으로는 미하엘의 태도도 공감이 간다. 과거의 낙원에서 그녀를 사랑했던 추억속에서 지내려면 그녀가 문맹인 그대로 남아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미하엘은 그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한나를 사랑했던 것이다.
최근 나는 분대장을 임명받았고 분대원들의 군생활에 대한 속내를 알아내려 무던히 노력하였다. 매일 저녁마다 분대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나의 예상보다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소대 내에서 개선되었으면 하는 사소한 부분에부터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육체적, 심리적 불편함까지 들을 수 있었다. 이전에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 역시 그런 일들을 겪으면서 군생활을 하였기에 후임대원들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조금 더 힘내라는 가벼운 응원의 한마디만 건네고 이를 외면하곤 했다. 이는 미하엘의 사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후임대원에게 진정한 응원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후임대원의 고충이나 고민을 듣고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방향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가령 가정의 불화로 고민이 있는 대원에게는 단순한 위로가 아닌 충분한 공감을 해주고 지금 위치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 사례의 경우, 분대장의 힘만으로는 해결하는데 어려움이 있었기에 소대장님께 후임 대원의 상황과 대원이 겪고 있는 심리적 상태를 가감 없이 보고하여 후임 대원이 적절한 조치를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외에도 긴장하면 말을 더듬는 대원이 있는데, 최대한 편한 분위기를 조성하여 긴장감을 풀어주고 나의 분대원으로 배치하여 조금 더 신경을 써서 보살펴 주기도 했다. 이 대원의 경우는 분대장으로서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서 단발성 조치가 아닌 군생활 전반에 걸쳐서 적응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도록 노력할 것이다. 나의 방식대로만 후임 대원을 챙겨주는 것에서 실제로 후임대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내 사랑의 태도가 바뀐 것이다. 가끔 이로 인해 부담을 느끼긴 하지만 내가 느낄 부담보다 큰 어려움을 느낄 대원들을 생각하며 지금의 마음가짐이 흐트러지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
한편, 미하엘이 한나를 법정에서 만나게 되었을 때, 미하엘은 재판에 참가한 모두가 마비증세를 겪었다고 회상한다. 여기서 마비증세란 나치 전범들의 증언을 들을 때, 처음에는 경악을 금치 못하고 안타까워했지만,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그것들을 대단치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를 경악스러움이 일상으로 침투하여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무자비가 일상이 되었다고 표현한다. 우리의 군생활에서도 많은 대원들이 비슷한 마비증세를 겪고 있다. 나 또한 전입 당시 ‘신병은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신병은 무조건 궂은 일을 도맡아 해야 한다’는 불합리를 겪고 당황스러움을 느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에 대한 인식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버림을 느꼈다. 나에게도 마비증세가 온 것이다.
독서 후 나의 태도에 대한 깊은 반성을 하였고 조금 더 후임 대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그러자 마비증세로 인해 인식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선임 대원들에게 군기가 든 모습을 보여주려고 눈치를 보며 당연히 누려야 할 편의를 누리지 못하는 대원들이 있었다. 그러한 부분에 대해 분대장의 권한으로 쉴 때는 눈치보지 말고 쉬고 필요 이상의 긴장을 가지지 말라는 내용을 지시했었다. 물론 한번의 지시로는 대원들의 태도가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 눈치를 볼 것이고 필요 이상의 긴장을 할 것이다. 다만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대원들이 신병들도 편안한 분위기를 누리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미래의 소대원들도 같은 생각을 견지하기를 바랄 뿐이다. 즉, 나의 작은 노력으로 시작하여 모든 대원들이 마비증세에서 벗어나는 큰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15개월 동안 군생활에 전념하며 독서하니 등장인물의 심리를 군생활에 치우쳐서 받아들인 느낌이 있다. 내가 속해있는 단체는 미하엘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를, 그리고 한나처럼 절망을 느끼는 대원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 감정 이입이 강하게 되었다. “책 읽어주는 남자”는 분대장의 위치에서 대원들간의 관심과 애정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나에게 야심을 심어주었다. 그 야심은 앞으로의 군생활, 그리고 성남수정경찰서 169 방범순찰대의 모습을 더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이고 이미 조금씩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나 그리고 169 방범순찰대원들의 군생활이 경험이 아닌 추억이 되기를 바라며 본 독후감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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