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연구실에 들어왔을 때, 내 위로는 석사 과정 대학원생 한 명과 통합 과정 대학원생 세 명이 있었다. 통합과정 선배들과는 연차가 꽤 많이 나는 편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아직 4년차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가 연구실에서 가장 연차가 높은 학생이다. 연차가 많이 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년차때부터 연구 과제의 Project Manager(PM)을 맡기도 했다. 여기서 연구 과제라고 함은 외부 기관으로부터 연구비를 지원받아 약속된 기간 안에 연구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의미한다.
연구실마다 문화가 다르니 우리 연구실의 PM의 역할을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세 가지 정도가 있을 것이다: (1) 지도교수님께서 연구 방향성에 대한 supervision 을 해주시면 그것에 맞추어 세부적인 연구 계획을 짠다, (2) 연구 계획이 차질 없이 수행될 수 있도록 관리한다, (3) 연구 현황에 대해 지도 교수님께 적합한 조언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혼자서 다 하는 것처럼 써 놓긴 했지만, 모든 과정에서 교수님께서 지도를 해주시고, 연구 책임자가 책임질 수 없는 계획은 수립하지 않는 것이 내 원칙이라 교수님께 확인을 받는게 내 마음도 편하기도 하다.
대학원생들의 인건비의 원천은 이러한 연구 과제이기 때문에 연구 과제가 끊긴다면 연구의 연속성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돈을 투자할 마음이 드는 연구를 제안하고, 책임감 있게 과제를 마무리 지어서 다음 연구 과제를 수주할 수 있는 평판을 유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하고 싶은 연구가 있더라도, 제안서는 그 연구와 완전히 일치하게 작성하진 않는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 연구와 해야 하는 연구가 아래 그림과 같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게 된다.
이건 어디까지나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PM 의 입장이다. 안타까운 점은 대학원에 새로이 들어오는 학생들의 경우 "하고 싶은 연구" 가 없는 경우가 많다. "데이터 분석을 하고 싶어요"와 같은 형태로 두루뭉술한 그 무언가만 있을 뿐, "기존의 연구들이 한계점이 있는 것 같은데, 그 한계점을 데이터 분석을 통해 돌파하는 연구를 하고 싶어요"는 없다. 그렇기에 우선 연구실에 들어오면 연구 과제에 참여하게 되고, 연구 과제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연구를 찾고 거기서 자기만의 연구 주제를 탐색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기 보다는, 이미 있는 과제에서 관심 주제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1) 세부 연구 계획은 이미 계획된 상태이고, (2) 연구 과제의 기간은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최고의 상황은 후배가 충분히 고민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신만의 연구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한정된 과제 기간에서 고민과 시행착오가 너무 길어지면 제안서의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다. 결국, PM이 매우 깊게 후배의 연구에 관여하여 연구 기간을 단축하거나, 후배에게 연구 역할을 아주 조금만 잘라서 주게 된다. 결론적으로 후배는 아주 작은 ownership 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여차 저차 연구 과제는 제한된 시간 안에 잘 마무리된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direction 을 많이 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연구에 기여한 부분과 후배가 기여한 부분은 명확하게 나누어서 생각하고자 한다. 예컨대, 연구 과제의 결과물로 논문화 작업을 수행한다고 하면, 각 구성원의 기여점을 나누어서 나는 후배의 기여 사항을 마치 내가 한 것처럼 포장하지 않는다 (당연한 연구 윤리다).
연구 과제를 잘 마무리 지었고, 각자의 기여가 조금씩은 있기에 모두가 행복할 것 같았다 (돈도 잘 따왔고..). 그러나 최근에 제 3자를 통해서 후배가 ownership 없는 연구를 한 것 같아 속상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굉장히 신경이 쓰이고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순 없는 것이고, 그냥 마음이 너무 좋지 않았다. 어쩌면 이 친구에게 해야 하는 연구와 하고 싶은 연구는 아래 그림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leading 한 연구 과제에 참여하지 않고 본인이 하고 싶은 연구를 찾고 수행하게 했으면 행복했을까? 연구 과제를 완전히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조금 더 기다려 주는 게 맞는 길이었을까? 혹시 내가 후배들이 성장할 시간을 빼앗은 건 아닐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남은 대학원 기간에는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대책을 생각해야 겠다.
내가 만약 대책을 찾지 못한다면, 바라 건데, 다음 연구 과제는 후배가 원하는 주제가 되어 하고 싶은 연구를 수행했으면 좋겠다.
최승현 포항공과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 통합과정 seunghyun.choi@postech.ac.kr
최승현 통합과정은 포항공과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학과에서 석박사통합과정에 재학 중이다. 학부 시절 연구에 대한 관심이 없었으나 훌륭한 지도교수님을 만나 대학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국내 반도체 업체와의 협업을 통해 다단계 제조 공정의 공정 개선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현재는 기계학습, 최적화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여 네트워크화된 공정의 관리 방법에 대한 연구를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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