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영화 소개
휴가 기간동안 가족들과 넷플릭스로 영화를 많이 봤습니다. 부모님의 취향을 반영하다보니, 고전 영화도 보게 되었는데, 오늘은 그 영화들에 대한 간단한 리뷰와 저의 생각을 함께 엮어내는 것을 목표로 글을 적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영화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Kramer vs. Kramer) 입니다.
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629
한글로 되어있으면 많이 뜻이 전달이 잘 되지 않아, 영어로 된 포스터도 함께 준비했습니다. 미국에서는 결혼한 여성의 성씨가 남성을 따라가게 됩니다. 여기서 Kramer는 그 성씨를 말하는 것이고, 이혼하게 된 두 크레이머 씨들이 양육권을 두고 법률적 공방을 다투는 내용을 일부 다루고 있어 제목이 이렇게 설정되었습니다.
남편 테드와 아내 조안나는 사랑을 하여 결혼을 했지만, 아들 빌리의 출산 이후 둘의 사이는 점점 소원해집니다. 누군가의 어머니의 삶을 살게된 조안나가 직장을 다니지 못하게 되며, 자신의 삶의 가치에 대해 상실감을 느끼게 되지만, 남편 테드는 그에 대해서 케어해 줄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조안나는 갑작스럽게 집을 떠나게 되고 (결국 이혼을 합니다) 1년 8개월만에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양육권 소송이라는 소식과 함께. 한편 그 기간동안 테드는 난생 처음 양육이라는 것을 하게 되고, 그를통해 평소 챙기지 못한 아들의 속마음도 알게 되고 아내의 삶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됩니다. 물론 직장과 육아를 병행하며 업무 퍼포먼스도 떨어지게 되어 해고 당하기도 하고, 아이가 정글짐에서 떨어져서 10바늘을 꿰매기도 하는 등 두 영역을 병행하는 것에 조금 지치는 모습도 나오기는 하지만, 적어도 아이와 아버지 간의 관계는 돈독해집니다. 1년 8개월만에 돌아온 조안나는 자신의 정신병도 치료하고, 높은 연봉의 직장을 가지고 양육권을 가져오려고 합니다.
과연 둘 사이에서 누가 양육권 소송에서 승리하게 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둘이 겪게 되는 어려움과 깨달음이 이 영화의 묘미라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 영화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 입니다.
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0410
영화는 미국 남부 지역의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 미국에서는 백인과 미국 사이의 인종 차별이 매우 심하였는데, 영화 중에도 나오지만, 흑인과 백인은 같은 화장실을 쓸 수 조차 없을 정도로 차별이 강했습니다. 포스터 우측에 계신 데이지 부인은 매우 깐깐한 성격의 부자집 할머니이고, 왼쪽의 호크씨는 넉살 좋은 성격의 데이지 부인의 운전 기사 겸 비서 역할을 하는 직원입니다. 직원이라고 하지만 데이지 부인은 이 흑인 직원을 몹시 하대합니다.
교사 출신인 데이지가 "교양인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실제로 차별을 당하는 호크의 "날것 그대로의" 발언들이 대립되면서 재밌으면서도 슬프게 당시 미국의 인종차별이 어떤 형태로 나타났는지 묘사됩니다. 영화 상 데이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강연을 들으러 다닐 정도로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는 점을 인지하면서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이런 강연에 참여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시선을 받기도 한다고 간접적으로 나타납니다), 교육을 누릴 수 없는 호크가 까막눈이라는 것도 모른 체 문맹을 할 수 없는 일들을 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갈등은 교사인 데이지가 글씨 읽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아름답게 해소됩니다. 이런 식으로 흑인을 하대하는 백인 할머니와, 그것을 넉살 좋게 받아내는 흑인 할아버지가 서서히 서로를 아끼는 친구가 된다는 조금은 뻔한 이야기를 영화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 영화 "언터쳐블: 1%의 우정" 이 이 영화를 일부 오마주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차별, 편견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고착화되 성역할에 만족하지 못한 여성의 일탈로 발생하는 문제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는 우리나라에서 현재 진행형인 문제라고 보여집니다. 80년대 개봉한 영화에서 그려낸 사회적 갈등이 2021년인 지금도 해결하지 못한 걸 보면, 아마 우리나라가 이런 문제를 받아들이는데 조금 많이 늦은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한편,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의 인종간 갈등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적은 없지만, 사회 곳곳에 만연하고, 해외 이민자 수가 증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언젠가 크게 터질 법한 문제로 보입니다.
저는 차별이나 편견이 왜 생기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인종 차별에 대한 문제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 그것이 왜 문제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 사회에 뿌리를 내렸는지를 탐구해서 결론을 얻어내야, 인종 차별을 해결할 정당성과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모두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른 상태에서, 차별과 편견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을 전제하고 얘기를 한다면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편견은 외부에서 들려오는 신호로 부터 생기는 대중의 분류기라고 생각합니다. 21개월동안 북한의 만행에 대해 교육받은 군인들은, 그 신호로 북한은 나쁜 곳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되고, 북한 국민의 불행한 일상에 대한 신호에 노출된 아이들은 북한을 도와줘야할 대상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둘 중 무엇이 잘못된 편견이고 옳은 편견일까요? 혹은 편견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비이성적인 행동이기 때문에 지양해야하는 걸까요? 이렇게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화를 하게 된다면, 문제 해결은 없고 이상한 결론만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19세기 미국에서는 이런 탐구가 부족하여 인종 차별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 사례가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이는 분리 평등 정책 (separate but equal) 이라는 법적 원칙인데요, 흑인과 백인에게 분리되어 서비스를 제공하되 동일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한다면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 보면 말이 안되지만, 당시에는 이것이 헌법에도 위배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흑인들에게 백인들과 동일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설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시장 경제에서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에는 문제에 대한 탐구없이 "백/흑인을 분리한다", "그러나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면 차별이 아니다" 라는 두 가지 사항에 집중하여 발생한 원칙이 아닐까요. 원인에 대한 분석은 공학뿐 아니라 정치, 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와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는 성역할의 고착화와 인종 차별이 왜 문제인지, 그리고 성별과 인종에 대한 편견이 왜 나타났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잘 나타내 준 영화입니다. 교육의 기회가 없어 잡부 일 밖에 할 수 없는 호크를 통해, 흑인은 열등한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편견이 왜 생기게 되었는지와 그것이 왜 올바르지 못한지 설명되기도 하며, 호크가 벌어온 수입을 통헤 (이건 제 추측입니다) 대학의 교수가 된 호크의 손녀 소식을 통해 이것이 해결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한편,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에서는 성역할을 포기하는 과감한 선택을 하는 조안나를 통해 아내이자 엄마의 삶에서 벗어난 여성이 어떻게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앞서 말씀드린대로, 편견은 반복되는 신호에 의해 생기는 대중의 분류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튜브와 같은 매체의 발달로 미디어를 소비하는 사람과 생산하는 사람 사이의 선호에 따른 매칭이 더욱 쉽게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이 사회에는 편견이 매우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인종, 성별 뿐 아니라, 경제적 능력, 성적 지향성, 정치 성향까지 모든 부분에서 편견을 야기하는 미디어와 그것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미디어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마냥 거짓을 바탕으로 유언비어를 퍼뜨리기만 하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컨대, 성폭행 당하는 여성을 도와주려고 강간범을 때려 잡았더니 여성이 도망가서 폭력 전과가 생겼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여성은 도와주면 안된다"는 편견을 만들어 내는 식으로 말이죠. 실제로 직접 때려잡다가 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경찰에 신고를 하는게 가장 적절한 메뉴얼이기 떄문에 "직접 도와주는 것은 위험하다"는 편견은 매체를 소비하는 소비자에게는 좋은(?) 영향일수도 있지만, 여성을 도우면 안된다는 것은 그리 적절한 편견은 아니라고 봅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편견을 야기하는 매체들은 생산되고 소비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죠. 저는 아직 이러한 부정적인 편견을 제거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방법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를 토대로 개인적인 로컬 옵티멈을 찾자면, 적어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편견을 갖지 않는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호크와 데이지가 인종을 뛰어넘은 친구가 될 수 있던 것도, 서로에 대해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이고, 테드와 조안나가 서로를 이해하게 된 것도 성역할을 떠나 서로를 인간 그대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도 저와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 편견이 없이 살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들면, 믿고 거르는 XX학과 라던가, XX 동아리와 같은 말에 노출되면 저도 모르게 그 집단에 대해 편견이 생기곤 합니다. 편견이 있더라도, 그 단체에 속한 친구들과 함께 지내며 얘기를 나눠보니, 집단에 대한 편견은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없다고 자신있게 얘기는 못해요)더라도, 친구에 대해서는 그 집단의 그림자를 씌워놓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간을 배경 없이 인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고리타분한 결론이지만, 그래도 주변 사람을 대하는 태도부터 바꾸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게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차별과 편견의 해소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RE-Feel > 영화 되새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텔 뭄바이 (2018): 신념의 차이와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 (0) | 2022.02.01 |
---|---|
돈 룩업 (2021): 진실을 가리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0) | 2022.01.02 |
레디 플레이어 원 (2018): 메타버스의 비극을 어떻게 막을까 (0) | 2021.05.30 |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리그 (2021): 0.99999... 는 1이 아니다 (0) | 2021.05.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