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강남에서 만나기로 한 날 시간이 조금 남아서 교보문고에 들렀습니다. 당시에도 유튜브 중독에 빠져있던 터라 이번 기회에 틈나면 책을 읽는 사람이 되어보겠다는 취지로 "그냥 재미있는 소설 하나 잡아서 읽자"는 마음으로 소설 서가로 발을 옮겼습니다. 잔잔한 소설이나 교훈적인 소설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재미를 주는 소설을 찾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추리 소설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중에서도 반짝이는 표지로 저를 유혹하는 "수호자들"에 눈길이 오래갔고 오랫동안 주변을 맴돌다가 결국 책을 구매했습니다. 결론부터 쓰자면 인천 공항에서 보스턴 공항까지 가는 12시간이 넘는 비행 시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서 다 읽어버렸습니다. 책 읽기에 새로운 취미를 붙이고 싶으신 분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하는 도서입니다.
뭐가 그렇게 재밌었나
단순하게 얽힌 인물들
수호자들은 억울하게 유죄를 받아 (혹은 그들이 판단하기에 받았다고 생각되는)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단체입니다. 수호자들은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억울한 이들을 구제해 주며, 유죄를 선고받은 법정의 기록에 정면으로 반대하기 위해서 새로운 증거와 증인을 찾는 것이 그들의 주요한 업무입니다. 아무래도 증거보다는 증인 쪽에 조금 더 힘을 실어서 내용이 진행되기 때문에 꽤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해도 521 페이지라는 소설의 분량을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 나오는 것은 아니고, 억울하게 갇힌 인물을 중심으로 관계가 정립되어 있기 때문에 인물 간의 관계가 굉장히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 이름도 영어권 이름이라 외우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죄와 벌 읽다가 등장인물들 이름들이 헷갈려서 수차례 포기했던 1인으로서 매우 큰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명확하고 단순한 관계는 곧 우리가 서술의 단순함을 의미하고,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기억해야 하는 내용은 "수호자들이 A라는 사람을 설득해서 증언이 거짓이었다고 토로하게 만든다", "이제 필요한 건 B라는 사람을 두들겨 패서 은닉한 증거를 찾아낸다"와 같은 서술자의 일관된 목적이고, 저자가 우리에게 던져 주는 이야기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호자들이 어떤 과정을 겪어왔는지에 대한 신나는 세부 스토리입니다. 결국 우리는 뼈대는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수호자들과 함께 살을 붙여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큰 부담 없이 소설을 즐길 수 있습니다.
수호자들! 믿고 있었다구!!
결국은 권선징악에서 우리는 쾌감을 느낍니다. 수호자들은 가난한 환경에서 한정된 예산으로 억울한 약자를 구출해야 하는 사람들이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난관을 헤쳐나갑니다. 이 과정 자체를 함께 하는 즐거움이 저에게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엉망진창이었던 과거의 사법 체계
지금이야 전국 어디에 가도 CCTV가 설치되어 있어서 도망가는 범인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고, 아주 작은 혈흔만 있더라도 혈흔의 주인이 누구인지 손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런 기술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서 굉장히 많은 부분을 "전문가"의 "추리"와 "믿을만한" 증인들의 증언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인물들의 법정 기록을 살펴보면 전문가도 없고, 추리도 없고, 믿을만한 증인도 없습니다. 어디서 세미나 몇 번 듣고 온 사람이 법의학 전문가가 되고, 그러다 보니 추리라는 것도 그냥 누군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지어 놓고 시작합니다. 게다가 증인들은 죄다 돈이나 플리 바게닝으로 가짜 증언을 서슴없이 합니다.
누가 봐도 엉망진창이었던 사법 체계이지만, 그런 체계 속에서 결정된 형을 살고 있는 억울한 이들을 구해줘야 하는 상황 자체가 저에게는 흥미롭게 다가왔습니다. 약간 무능하고 관료적인 체계를 부수는 과정을 함께 즐기는 느낌이었습니다. 게다가 새롭게 무장한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전문가의 추리"를 진짜 전문가와 증거를 통해서 뒤집어야만 하는 상황은 공학자인 저에게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왔고, "증인"들의 증언은 온정에 기대어 번복하기를 설득하는 과정은 "제발 저 사람이 마지막에 딴 말하면 안 되는데.."와 같은 불안감과 짜릿함을 함께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망가진 사법 체계 속에서 내려진 결정을 번복하기 위한 수호자의 여행은 재미없게 느껴지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다 보고 나니
이분법으로 갈리는 것 같은 법원의 판결도 확률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다시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앵무새 죽이기에서는 흑인이기 때문에 일부로 유죄를 주는 배심원의 성향이 수호자들에서는 흑인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높다는 배심원의 편견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유사점이자 유일한 차이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과학 수사의 발전으로 단순한 편견이 개입할 여지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이런 편견을 사라지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편견으로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을 줄여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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