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이 넘는 기간을 대학원에 있다 보니 학회에 자주 참석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팬데믹 기간과 대학원 기간이 통째로 겹치는 바람에 해외 학회를 많이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팬데믹이 끝난 후에는 종종 해외 학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올해 중순에는 미국의 인디애나폴리스로 INFORMS QSR 분과의 소학회에 참석했고, 저번주 (10월 넷째 주)에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프르의 APIEMS 2023에 참석하였다. 이번에 참석한 APIEMS 학회에서의 가장 큰 업적을 고르자면, 교수님께 흠잡을 것 없이 완벽한 구두 발표였고 연구 콘텐츠도 좋았다는 칭찬을 받았다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학회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모두 얻은 것 같고, 말레이시아를 떠나는 길이 전혀 아쉽지 않았다. (비록 한국에서 심한 배앓이를 하긴 했지만..)
문득 2년 차에 참석했던 한중품질심포지움이 생각이 났다. 그때는 내가 해야 하는 구두 발표를 잘해야겠다는 부담감에 다른 사람들의 발표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었다. 결국, 학회가 끝나고 '첫 영어 구두 발표를 어떻게 어떻게 해냈다'는 기억뿐이 남지 못했다. 생각해 보니 국가에서 지원해 주는 연구비로 학회에 참석하면서, 고작 저 정도 깨달음만을 얻고 돌아온다면 그것이야 말로 잘못된 연구비 집행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희망컨대) 나의 대학원으로서 해외학회 참여가 올해가 마지막이길 빌면서, 저년차 대학원생이 연구비로 가는 해외학회에서 더 많은 깨달음을 얻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학회에서는 학회에서만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해외 학회는 다양한 국가의 연구자들이 모여서 자신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는 잔치와도 같다. 그 과정에서 친목 도모도 당연히 있을 수 있고, 평소에 논문에서만 봤던 연구자를 실제로 만나서 인사도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행사가 공짜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올해 APIEMS를 기준으로 학회 참석비만 50만 원 정도였으며, 이를 단순하게 계산하면 하루에 10만 원씩 받는 파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이는 해외학회 치고는 저렴한 편이고, 올해 INFORMS Annual meeting의 학회 참석비는 하루에 20만 원을 받는 격이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하루에 10만 원 내고 가는 파티에 참석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귀한 돈을 지불하고 참석한 파티에서 매우 제한된 시간 동안 연구 결과도 나누어야 하고 친목도모도 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매우 빈번하게 논문을 고치고 있는 학생들을 볼 수 있다. Parallel session에서 발표자가 열심히 발표하고 있는데, Overleaf를 띄어놓고 열심히 논문을 고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면 상당히 안타깝다. 세상에나! 우리가 에버랜드 자유이용권을 할인받아서 구매하면 3만 원 정도이고, 3만 원짜리 자유이용권도 최대한 "뽕을 뽑을" 기세로 애버랜드에 가는 와중에, 종일권이 10만 원이 넘는 학회는 딴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애버랜드에서 논문을 고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심지어 어트랙트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우리는 논문을 고치지 않는다. 우리는 대기 시간조차 애버랜드에서 느낄 수 있는 지루함과 기대감을 충족시키는데 집중하고, 어트랙트를 타는 순간에는 모든 신경을 말초신경에 올인해서 그 순간의 짜릿함을 즐긴다. 학회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한다. 학회에서는 학회에서만이 즐길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에 전념을 다해야 한다. 그래야 후회가 없다.
개인적으로 후회가 많이 남는 해외 학회를 수차례 겪어본 대학원생으로서 학회에서 해야 할 일 TODO와 지양해야 하는 일 NOT TODO를 정의하면 아래와 같다. 물론 여기서 추가되야 할 사항도 있고, 상황에 따라 제거돼야 할 사항도 있다. 예를 들어 논문 리비전 듀가 내일인데 "학회니까 학회에 집중해야지"같은 마음가짐은 가져선 안된다.
개인적으로 네이티비 코리안으로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TODO의 "대학원생이라고 주눅 들지 말고 동등한 연구자라고 생각하기"이다. 우리는 정당하게 10만 원을 지불하고 파티에 참석한 사람이고 충분히 이 파티를 즐길 권리가 있는 사람이다. 학회라는 파티에서 조교수라고 더 열등하고, 저명한 학자라고 더 대우받는 곳은 아니다. 하물며 대학원생조차 동등한 연구자로서 이 파티를 즐길 권리가 있다 (어쩌면 '대학원생조차'라는 표현도 동양권에서만 쓰이는 표현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물론 상대 연구자를 존중하는 태도는 좋지만, 필요하다면 "당신 이 부분이 틀린 것 같다"와 같이 질문할 수도 있는 것이고, "아마 당신이 설명했지만 내가 이해를 못 한 것 같습니다, 이 부분을 다시 설명해 주세요"와 같은 내용 반복에 대한 질문도 할 수 있다. 청중이 이해를 못 했다면 잘못은 발표자에게 있으니 파티 참가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누리자.
그리고 NOT TODO에서 "영어 못한다고 주눅 들기"도 마음에 담아두는 게 좋다. 영어, 그거 못할 수도 있고 fluent 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나의 fluent 하지 못한 영어? 모국어가 영어인 형님들께서는 다 이해해 주신다. 입장을 바꿔서 명동 한복판에서 어눌한 한국어로 "을지로 4가는 어떻게 가요?"라고 물어보는 외국인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한국어 고수이기 때문에 어눌하게 말해도 이해할 수 있다. 영어도 마찬가지다. 절대로, 절대로 주눅 들지 말고 열심히 질문하고 다니자. 영어를 잘 못하는 나도 상대의 말을 이해 못 하면 Pardon을 연발하고, 아예 구두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 노트에다가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물론 조금 주눅들긴하지만, 뻔뻔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고, 이런 노력이 후회 없는 해외 학회 참여 경험을 낳았다.
발표 준비는 타국 땅을 밟기 전에 80% 정도 완성하고 가자
연구비를 지원받아서 해외 학회에 참석한 학생들을 여럿 봤는데, 이 중 발표를 하지 않은 학생은 나의 고등학교 동기 김석사밖에 없었다. 이 친구는 곧 은퇴를 하시는 우리 교수님의 연구실에서도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이고, 지금도 이해하기 힘든 케이스이다. 결국 연구비 펀딩을 받아 해외학회에 가는 대학원생들은 좋든 싫든 구두 발표나 포스터 발표를 해야 한다, 그것도 영어로.
일상에 치이고 교수님이 시킨 일을 하고 수강 과목 숙제를 하다 보면 발표를 준비할 시간은 한정된다, 몹시. 그럼에도 우리는 발표를 해내야 하고, 결국 많은 대학원생들은 학회장에 가서라도 마무리하겠다는 마음을 가진다. 개인적으로 그런 준비 자세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해외든 국내든 연구 자료를 발표한다는 것은 내 새끼 같은 연구 결과물을 대중에 공개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공개 과정에서 내 새끼가 못생겼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고, 예쁘다고 칭찬받을 수도 있고, 더 나아지는 방향을 조언받을 수도 있다. 적어도 이런 커뮤니케이션이 있으려면 내 새끼가 어떤지는 청자에게 정확하고 간결하게 설명해야 한다.
앞서 언급하긴 했지만, 내 발표를 청자가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온전히 나의 잘못이다. 청자의 수준을 잘못 설정해서 설명했거나, 자료가 미흡하고 미스리딩하거나, 혹은 아예 내가 이상한 영어를 지껄였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그런 상황은 절대로 피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지키는 원칙은 비행기 안에서 잠을 안 자는 한이 있더라도 타국 땅을 밟기 전에는 무조건 발표의 80%는 준비하는 것이다 (우리 교수님께서는 학회 발표 전에 리허설을 시키시는데, 이 점도 이 원칙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여기서 80% 란 약 15분-20분의 발표동안 사용할 10-20개 정도의 슬라이드의 순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수 차례 마음속으로 발표해 보면서 오탈자가 없음을 확신할 수 있는 수준을 의미한다. 그리고 구두 발표 전날 밤에 자기 전에 1시간가량 구두로 연습하면서 100% 수준을 맞추는 것이다 (이는 100점짜리 발표가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준을 의미한다, 어쩌면 100% 발표가 50점밖에 안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슬라이드 순서를 외우고 슬라이드와 슬라이드가 넘어가는 사이에 어떤 문장을 내뱉을지가 몸으로 외워졌다면, 포인터의 버튼을 누르는 짧은 순간에나마 청중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다. 80%의 완성은 청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만들고, 더 나아가 내 새끼를 더 잘 설명하는데 도움이 된다. 역시 제1원칙은 학회장에서는 학회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고, 학회장에 닿기 전에 발표 준비를 어느 정도 마무리해야 학회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
교수님께 감사하며
우리 교수님께서는 학회에서 제자가 발표하면 참석하셔서 들으려고 노력하시는 분이다. 사실 지금까지도 졸업생 선배들과 하는 우스갯 얘기로는 "100명의 청중보다 1명의 교수님이 날 더 긴장하게 만든다"가 있는데,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공감하는 것 같다. 교수님께서는 어떠한 청중보다 내 연구를 잘 아시는 분이고 그래서 발표를 못하면 뭐가 부족했는지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전에는 교수님을 보면 긴장감만 감돌았는데, 연차가 조금 차니 이렇게 제자들의 발표 시간을 체크하시고 일일이 참여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발표 이후에 코멘트까지 주시고, 물심양면으로 챙겨주시는 감사한 분이다. 어쩌면 완벽한 발표를 하겠다는 것은 공저자인 교수님이 보시는 앞에서 더 좋은 발표를 하겠다는 다짐에 기인할 수도 있다.
만약 당신의 교수님이 이런 훌륭한 분이 아니어도, 공저자를 리스펙 하는 마음으로 발표를 잘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잊지 마라. 공저자에게 감사하고 공저자에게 감사받을 발표를 하는 멋진 대학원생이 되자.
쪽팔리자, 어차피 95% 이상은 오늘 보고 말 사람들이다
연구재단에서 국제 학회를 정의할 때 최소 3개국의 연구자들이 모인 학회라고 정의한다. INFORMS가 가진 위치는 대략 "미국산업공학회"이긴 해도 INFORMS annual meeting에 참석하면 적어도 30개 국가의 연구자들이 참여하는 것 같고, 이번 APIEMS도 내가 기억하는 발표자의 국적만 해도 6개는 되는 것 같다.
우리가 명동 거리에서 우연히 누군가의 발을 밟았다고 생각해 보자. 죄송한 일이고 부끄러운 일이긴 하지만 번잡한 거리에서 충분히 발생할 수 있는 excuse이고, 밟힌 상대도 excuse를 표출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것이다 (물론 X랄 X병을 떠는 놈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석, 박사들이 모이는 학회에서는 그런 사람은 거의 없다). 학회도 마찬가지다, 내가 하는 질문이 이상할 수도 있고, 영어가 잘못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일, 학회에서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excuse이고 이 정도는 모두가 받아들인다. 트럼프가 영어 발음이 이상한 일본 기자에게 쪽 주듯이 그런 이상한 일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게다가 명동거리에서 발 밟은 사람을 인생에서 또 만날 가능성은 매우 적은데, 3개국 이상의 연구자가 모이는 학회에서 내가 한 실수를 기억할 연구자는 더더욱 없다. 기왕 학회에 돈 내고 참여하는 거, 조금 쪽팔리고 하고 싶은 말 다 쏟아내고 오자!
일과 시간이 끝나면 노는 것도 괜찮다.
말해 뭐 하겠는가! 제1원칙 학회에서는 학회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을 온전히 즐겼다면, 학회가 아닌 시간에는 펀딩 해주신 분들께 감사하며 학회 장소의 다양한 즐길거리 누려보자. 방에서 넷플릭스 키고 누워있는 것보다는 훨씬 가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래도 먹을거리는 조심하자, 필자는 말레이시아에서 굴을 잘못 먹어서 하루동안 20회가 넘게 화장실에 들락거리고 있다. 발표장에서 터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국뽕도 취해보자
이건 갑자기 넣은 것인데, 나날이 국격이 높아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만약 국가과제로 학회에 간다면, 대한민국 국민임에 자부심을 갖고 국뽕을 느껴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승H정전 > 대학원생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칠전팔기의 논문 게재 승인 -3년의 시간을 돌아보며 (1) | 2024.04.10 |
---|---|
[Unofficial] 국립대 교수와 사립대 교수와의 차이 (0) | 2023.11.05 |
LG TECH CONFERENCE 2023 후기 - LG는 가전이 아니라 미래를 만들고 있었다 (0) | 2023.03.17 |
국제학회에서 느낀 산업공학의 다양한 연구 방향 (0) | 2022.10.24 |
초 단기 강사 후기 - 누가 교수가 되어야 하는가? (2) | 2022.09.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