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 입학하면서 외할머니께서 구두를 선물해 주셨다. 정확히는 클락스 사의 데저트 부츠를 선물해 주셨는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참 잘 신었다.
인생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관리하면서 신은 구두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관리하는 게 귀찮았는데, 하다 보니까 애정이 생기고 작은 흠집이라도 보이면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그야말로 금이야 옥이야 아끼면서 신었던 구두다.
그렇게 관리하면서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어릴 때는 멋 부릴 수 있는 구두가 이것밖에 없어서 자주 신었다. 나이가 들면서 구두도 많아지고 선택 빈도가 줄긴 했지만, 그래도 신발장 앞에서 눈에 띄면 신게 되는 그런 구두가 되었다.
저번 달에 구두의 끈을 묶는데 갑자기 구두끈이 끊어져 버렸다. 바닥을 질질 끌면서 집에 왔는데 밑창이 완전히 닳아버린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금이야 옥이야 아껴서 신을 때는 언제고 밑창이 닳아버린 것도 모르고 신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신으면 밑창이 너무 많이 닳아서 문제가 될 것 같았다. 고민을 했다. 밑창을 다시 바꾸면 가격이 10만 원은 넘게 들 것이고, 그 돈에 조금 더 보태면 유사한 모델의 새 제품을 구매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두는 나와 추억이 많은 구두이다, 밑창만 갈면 추억을 쌓는 시간이 늘어날 수 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밑창을 교환했다. 이렇게 결정한 가장 큰 이유는 이제는 하늘나라로 가셔서 돌아오실 수 없는 할머니께서 선물로 주신 구두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제품을 쓰게 되더라도 이 구두가 가진 의미 이상의 감동을 줄 것 같지는 않았다. 선물 받은 구두를 애지중지 관리하던 추억을 회상하며 수선 전문점으로 보냈다.
그렇게 일주일정도 뒤에 수선이 끝난 구두가 학교에 도착했다. 구두의 어퍼는 지난 12년간의 추억이 그대로 남아있고, 밑창은 새로워져서 마치 견고한 베젤 위에 오래된 작품이 자리 잡고 있는 느낌을 주었다.
그렇게 수선된 신발을 다시 신고 걸어 다니는데 이전의 크레페 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착화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에는 구두 밑창 닳는 것에 스트레스받기 싫어서 러버 솔로 교체했기 때문이다. 단단하게 느껴지는 바닥의 느낌에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지난 11년간 보여줬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으로 나와 추억을 쌓겠다고 선언하는 느낌이 들어서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단지 돈 주고 수선을 맡겼을 뿐인데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을 보면 내가 꽤나 이 구두를 아꼈었던 모양이다. 새로운 구두를 살지 고민했던 게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말이다. 아마도 구두가 가지고 있는 의미, 이것과 함께 했던 추억이 있었기에 기분이 이렇게 좋은 게 아닐까 싶다. 물건에 의미가 부여되면 그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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