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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H정전/마음 끄적

얇은 세대를 착취하는 세대 따돌림에 대하여

by 승공돌이 2022. 11. 3.

집단 간의 갈등이 판을 치는 사회이다. 영호남을 중심으로 한 지역 갈등은 근현대부터 시작된 우리나라의 역사이고, 성별 갈등은 이제 문제 해결이 아닌 창의적인 혐오 표현 창작으로 번졌다 (XX유충, XX녀 등..). 아래 세대가 버릇없다고 생각하는 세대 갈등은 적어도 조선시대부터  (출처: 조선왕조실록) 시작되어 최근까지도 MZ 세대에 대한 비난으로 계속되어 왔다. 이러한 갈등이 갈등이라 불리는 이유는 갈등을 벌이는 주체들의 집단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영남과 호남, 남성과 여성, MZ 세대와 비 MZ세대는 집단의 크기 차이가 존재할지언정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거대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6.25 전쟁 이후로 지나치게 빠르게 성장해왔고, 빨리 빨리 정신은 후대에 계승되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너무나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세대 간의 갈등은 이전의 다(多) vs. 다(多) 갈등과는 다르다. 발생하는 사회 문제마다 세대를 세분화하여 가장 피해를 보는 세대를 따돌림하는 방식이 드러나고 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윌리엄 버틀러의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의 첫 구절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이다. 노인이 살아온 나이만큼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으나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서 깊은 지혜만으로 살아남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1928년에 나온 시에서도 이렇게 지적하였으니, 그때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노인으로 살아가기는 더욱 힘든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면 그것이 보편화되는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 나라이다. 예를 들어 신용카드와 카드 단말기의 보급으로 우리나라의 현금 사용률은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편에 속한다. 높은 속도의 기술 보급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으며, 대표적으로 사람을 대체하는 키오스크는 코로나 점염병 바이러스의 창궐과 함께 이제는 보이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언뜻 유사해 보이는 기술의 보급이지만, 그 둘은 기술 사용의 진입장벽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실제로 2021년 실시한 서울시민 디지털 역량실태조사에 따르면  55세 이상 고령층은 45.8%만이 이용 경험이 있으며, 구체적으로 55~64세는 68.9%, 65~74세는 29.4%, 75세 이상 13.8%로 키오스크 사용에 대한 경험률이 매우 떨어진다.

서울시의 키오스크 보급률이 지방도시에 비해서 낮지 않으리라는 가정 하에, 서울시의 노인들의 키오스크 사용이 적은 원인은 두 가지 정도로 추릴 수 있다: (1) 노인 방문율이 떨어지는 업장에서 주로 키오스크를 사용한다, (2) 노인들이 키오스크를 사용하기 어렵다. 테이블링 사용법을 몰라서 전전긍긍하는 노부부를 위해 카카오톡 연동까지 대신해드린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1) 번 이유도 굉장히 관대하게 잡은 것이긴 하다. 두 가지 이유 모두 노인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는 없다. 차이가 있다면  (1) 번 이유는 주 수입원이 아닌 노인 고객을 거부하겠다는 의지이며 , (2) 번 이유는 무지성으로 노인을 거부하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싶다.

노인이 사용하기 힘든 키오스크가 전국적으로 퍼질 수 있었던 이유는 노인층이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세대의 끝단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피라미드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2022년 대한민국의 인구 피라미드를 살펴보면 확실히 70대 이상 노인의 비율이 매우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피해를 받는 노인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일단 그들을 배제 (라고 쓰고 따돌림이라 읽는다)하고 보급을 해버린 것이다.

 

2022년 대한민국의 인구 피라미드 - retrieved from https://sgis.kostat.go.kr/jsp/pyramid/pyramid1.jsp

 

아직 20대인 내가 느끼기에도 여전히 직관적이지 않은 인터페이스를 제공하는 키오스크가 많다. 특히 그나마 노인들에게 익숙한 매장인 맥도널드의 키오스크는 열등한 사용성으로 굉장히 유명하다. 그러나 유명한 노인 유튜버 박막례 씨가 맥도널드 키오스크 사용에 어려움을 호소하는 영상에 대한 젊은 세대의 비난은 그 수위만으로 노인이 기술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사실에 대해서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기술을 사용할 줄 아는 다수의 세대가 기술을 사용하지 못하는 협소한 세대를 따돌리고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그나마 "순한 맛" 댓글들이다

 

미국의 시인 시어도어 로스케는 “너의 젊음이 너의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 내 늙음도 내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라는 구절을 남겼다고 한다. 노인들도 우리 사회의 일원이며, 단지 키오스크를 못쓴다는 이유로 의식주 중 식에 대한 생활이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내가 작년 이맘때쯤 노인에 대한 기술 교육의 필요성을 작성한 적이 있는데, 다행히도 2023년까지 우리나라 과기정통부에서 2023년까지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디지털 권리장전과 디지털 사회 기본법을 만든다고 한다 [출처].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속에서 모두가 평등하게 기술을 사용하기 위한 기반이 다져지길 바란다.

 


소년을 위한 나라도 없다

대한민국은 분단 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있고, 대한민국 남성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병역의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저출산의 영향으로 징집 가능한 남성의 숫자가 줄고 있고, 국방부는 군 면제에 대한 벽을 높이는 방향으로 이를 대처하고 있다. 2020년 병무통계연보에 따르면 2010년 이후로 현역 판정 비율은 꾸준히 9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의 현역 판정 비율이 50% 수준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군 복무가 부적합한 자"에 대한 기준이 얼마나 엄격해졌는지 알 수 있다.

사실상 남성을 쥐어짜내는 것으로는 국가 안보 유지를 위한 병력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는지, 최근의 대통령 선거 시즌에는 여성 징병에 대한 논의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사실상) 남성만이 지고 있는 병역의 의무를 여성에게도 짊어지게 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나서 남녀 간의 갈등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런 와중에 청년들이 주로 사용하는 "에브리 타임" 커뮤니티에서 여성으로 추정되는 사용자가 여성 징병을 찬성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그런데 그 이유가 놀라웠다.

 

 

에브리 타임 여성 징병 찬성 글 1
에브리 타임 어셩 징병 찬성 글 2

 

요약하자면 현재 20대 여성들이 아닌 10대 이하의 여성들이 병역의 의무를 지게될테니, 국방력 약화가 오기 전에 여성 징병을 찬성하자는 것이다. 실로 대단한 근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가장 큰 원인이 두 가지 정도 있다고 본다. 첫 째는 소년들의 선거권 부재이다. 소년들이 선거권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의 의견을 입법부에 피력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소년들이 인구 피라미드의 바닥에서 매우 얇은 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인구피라미드를 살펴보면 10대의 두께는 20대의 그것의 반 정도에 불과하며, 이제 태어난 아기들의 두께는 훨씬 더 얇다. 이 두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10대는 원치 않는 여성 징병으로 결론을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다. 의견을 피력하고 싶어도 피력할 수 없으며, 설사 피력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수가 매우 적은 그들의 의견은 무시해버리는 것이다.

저출산과 고령화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국가의 미래가 불투명해졌고, 자신보다 얇은 인구층을 착취하면서 자신의 안위를 유지하는 것이 사람들의 기본 사고가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상 다수 간 갈등 구도가 아닌 소수 집단을 선정하고 대놓고 착취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회에서는 밝은 미래를 꿈꾸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태어날 아기가 착취당할 것을 알면서 아기를 낳는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선택이란 말인가. 조금 더 비관적으로 얘기하자면,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증가하는 미래는 수 억개의 멀티버스 중에서 단 한 가지뿐이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독재 지도자가 차우셰스쿠의 강제 출산 정책에 감명 받아 직접 시행하는 것뿐일 것이다. 

 

대한민국 출산율이 2 수준으로 높아지는 미래를 계산해주세요!!

 

그 어떤 세대도 착취 받지 않길 희망하며

비관적인 미래만 예상하면서 좌절하기보다는 이 상황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변화가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세대간 따돌림이 가능한 이유가 너무나 볼록한 현재의 20-50대 그룹의 존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구수로만 따지자면 그들은 영원한 기득권이기에 누군가를 따돌릴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이다. 큰 인구수는 큰 표가 되어 나타나고, 그들을 위한 정책으로 나타난다.

세대 별 끝단의 의견이 피력되기 위해서는 세대 별 국회의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선거구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인구가 적은 비수도권의 의견이 무시당하지 않도록 비수도권에 인구수 대비 더 많은 선거구를 배정하는 것처럼 (공직선거법 25조 2항) 착취당할 가능성이 높은 양 끝단의 세대를 위한 국회의원을 구성하는 것이다. 현 정치권에서 보이는 생색내기용 청년 대표가 아닌, 법률로써 국민의 대표성을 지역 대표성에서 세대 대표성으로 확장하여 해석하자는 것이다.

 

누군가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2050년의 인구 피라미드를 보고 나는 어디쯤에 있는지 확인해보면 좋을 것 같다. 내가 60대가 되어 생산성이 떨어지는 나이가 되었을 때는 생산성 높은 세대의 두께가 굉장히 얇아질 것이라고 한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내가 그 나이가 되면 그들을 착취하려는 마음을 먹진 않을까 두렵다. 그런 두려운 미래가 현실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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