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학회를 가게 되었는데 저렴한 비행편을 찾다 보니 인천 – 뉴욕 –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어지는 장거리 비행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인천 – 뉴욕 비행편이 14시간 이상 걸리는 장거리 비행이었기 때문에 인터넷 연결 없이 소비할 수 있는 컨텐츠가 필요했는데, 마침 학교 서점에서 “심리 스릴러”라는 처음 보는 장르의 소설을 판매하고 있어 큰 고민 없이 책을 짚었습니다. 다 읽는데 대략 5시간정도 걸렸는데, 읽으면서 잠도 자고 이렇게 후기까지 쓰고 있으니 결론적으로 장거리 비행에 적절한 도서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고른 도서는 심리 스릴러의 대가로 알려진 B.A Paris의 “테라피스트” 입니다. 국문으로는 “심리 상담가”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심리 상담가라는 제목과 어울리게 1인칭 주인공 시점에서 쓰인 소설에서 주인공의 긴박한 심리 묘사가 압권인 도서였습니다. 스릴러의 특성상 내용을 요약해서 독자의 재미를 떨어뜨리기보다는 도입부만 간단하게 서술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앨리스는 남자친구 레오와 함께 런던의 서클로 이사하게 된다. 같은 모양의 집이 원형으로 배치된 서클은 마치 판옵티콘처럼 서로서로 감시할 수 있는 구조이다. 친밀한 이웃들 사이에 낀 앨리스는 잘 적응하지 못한다. 단순히 외지인인 본인에게 부리는 텃세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쯤, 앨리스가 이사 온 집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된다. 앨리스는 살인 사건의 전말을 알고 싶지만 이웃들은 그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하지 않거나 심지어 이미 지난 일을 꺼내지 말라고 화를 낸다. 그 와중에 앨리스를 찾아온 사립 탐정 토마스는 이 살인 사건의 진짜 범인은 따로 있다고 하는데…
읽으면서 –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주는 공포
살인 사건이 일어난 집으로 이사 왔는데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 놓인다면 그 공간에 있다는 점으로도 무섭지 않을까요. 이 소설은 앨리스의 관점에서 서술되었기 때문에 앨리스가 느끼는 공포가 독자에게 그대로 전해집니다. 어두운 밤 집안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라던가, 누군가 집에 침입한 흔적이 있다든지 말이죠.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이웃처럼 보였던 사람들도 비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감시당하는 느낌을 주는 “서클”이 주는 공포감이 상당합니다. 의심이 해결될 것 같으면 더 거대한 의심이 다가오는 전개 속에서 아마 다른 분들도 저와 같은 색다른 공포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읽고나니 – 그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스릴러 장르의 소설이 잘 쓰였는지를 판단하는 척도 중 하나는 결말에서 본론의 의구심들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는가입니다. 떡밥만 잔뜩 뿌려놓고 회수하지 못한다면 좋지 않은 평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 관점에서 테라피스트는 이런 의구심들을 충실하게 해소한 작품입니다. 왜 이웃들이 의심받을 말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지? 앨리스가 왜 이 사람을 믿고, 이 사람은 의심했던 것이지? 저 말의 의미는 무엇이었지? 이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결말을 보고 나면 대부분이 해결됩니다. 마지막 30 페이지 정도에 걸쳐서 거의 모든 의구심들의 답을 주는데, 그 느낌은 흡사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들과 비슷했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은 “독자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트릭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의구심들을 해결하기 위한 장치를 본론을 읽는 과정에서 거의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갑자기 “뚜둔” 하고 어떤 트릭이 있었는지 나오면서 모든 일들이 해결됩니다. 만약 독자가 예측할 수 있는 트릭이었다면 더 재밌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추리물이 아닌 심리 스릴러인만큼 이 부분에 대해서 아쉬움보다는 통쾌함으로 느끼는 독자 분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믿을 수 있다는 것은..
미국에서 지내는 엿새 동안 저는 이방인이었습니다. 특히 제가 간 인디애나폴리스는 동양인의 비율이 그렇게 높지 않은 지역이었기 때문에 ‘내가 이방인이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방인에게는 믿고 의지할 무언가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한국인만 보면 반갑고,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서클”의 이방인 앨리스도 믿고 의지할 사람을 찾느라 고군분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살인 사건의 비밀이 풀리고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가 명확해졌을 때 마음이 편안했을 것입니다. 독자인 제 마음도 편해지는 느낌이었으니 말이죠.
믿고 의지할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 있는가를 제가 처한 환경에 맞추어 공감할 수 있던 작품이었습니다. 그리고 믿을만한 사람을 찾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는 것을, 내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 연인, 친구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를 다시금 깨닫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거짓을 말하고 있다면
세상이 아무리 팍팍해도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진 않습니다. 사실을 덜 말할지언정 거짓을 말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세상살이에서 참, 거짓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누군가의 거짓말로 모순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 상황에 맞추어 그럴듯한 수를 써서 모면하는 사람을 선택하기보다 누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지 이성적으로 판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저 말이 거짓이 되는군”, “이 말이 거짓이라면 저 말도 거짓이겠군” 하는 식으로 한 발짝 뒤에서 이성적으로 사리 분별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에게 비슷한 상황이 닥치면 이렇게 행동할지는 확신이 없지만 말이죠...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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